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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社會)

[社會] 사회적 성(젠더)의 폭력과 양면성

by Dongwan. G 2020. 3. 6.

사회적 성(젠더)의 폭력과 그것의 양면성

 

구 동 완

연세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

 

 

     사회적 성(gender)은 쉽사리 인지하지 못할 만큼 아주 은밀하면서도 강하게 우리의 삶을 제약하고 있다.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가정과 학교에서의 교육을 통한 사회의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기대를 무의식적으로 충족시키며 살아왔다. 과거부터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극단적이고 협소한 인식은 성차별에 인종차별, 빈곤까지 얹혀 고통받았던 흑인 페미니스트들의 생존적 호소까지 초래하곤 했다. 때문에 현대에 이르러 남녀평등이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고 안락함을 논하는 자들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약자였던 여성들의 투쟁의 시간들을 함부로 간과하는 것이다. ‘간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항상 강자의 위치에 있었던 남성 지배적 권력이고 주디스 버틀러에 따르면, 여성이 그러한 남성주의적 관점으로부터 형성된 이항대립의 반대항으로써 숨죽이고 살아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듯 남성의 타자라는 억압적 상황 속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전개해온 여성들이 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이중 노동을 통한 자본주의 재생산을 근거로, 자본주의는 곧 남성에 의한 여성지배의 가장 최근 모델로 간주하였다. 또한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남성의 책임을 구조로 돌리는 것이며, 역사적으로 남성들의 강간, 가정폭력같은 힘에 의한 여성 지배가 여성들의 여성적 역할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이외에도 흑인 페미니즘을 비롯해 여러 갈래의 여성주의 운동이 있다.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이전의 사회들은 왕권 주의, 봉건사회, 군부독재 같은 권위주의적 사회를 거쳐왔다. 특히 박정희 시대를 거친 한국 사회는 ‘남성다움’을 생물학적 남성의 이상향으로 만들었고, 섹스를 자신들의 권력을 확인하고 측정하는 도구로 인식하게끔 만들었다. 그 속에서 여성은 그러한 남편을 둔 신성하고 순결한 어머니일 뿐이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기성세대의 성에 대한 인식과 신세대의 인식 차이가 극명하여 가정에서의 성 담론을 차라리 안 하는 것만 못한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전인권은 대다수 남성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상당히 흥미로운 통찰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 같은 몇몇 통찰들은 특히, 글 전반부에서 남성성에 대한 과도한 일반화를 범해 아쉬운 단면들을 여실히 드러냈다. 밀라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여성적이거나 남성적이고자 노력한다는 것을 많은 사회학자들이 놓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Fevre & Bancroft, 146)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전인권이 제시한 남성은 자신이 만들어진 존재임을 깨닫지 못한다거나 승리한 남자는 ‘남자다움’이라는 판타지에만 관심있다는 말(노명우, 165~166)들은 그렇지 않은 남성들에게 또 다른 폭력으로 다가온다. 물론 이 부분은 여성의 성장과정에서 그들에게만 해당하는 여러 금기에 둘러 쌓여, 인간으로서 인식하기 전 여성임을 먼저 깨닫게 만드는 사회의 단면을 비판하고자 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또한 그러한 단면은 여성이 성장과정에서 거부하고 싶을 것 같은, 어느 정도로 이질적이고 낯선 느낌을 경험하는지에 대해 남성들은 도저히 가늠해볼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아직까지도 공교육기관이란 곳에서도 이러한 작태를 거두지 않은 채 남성중심적인 사고 연습을 시키는 이러한 풍토는 분명히 우리가 극복해 나가야하는 난제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 소수의 남성들을 일반화의 가두리 안에 배치하는 문제는 재고해봐야 한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남성성을 거부하는 그리고 거부하고 싶어 하는 생물학적 남성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특히 유전학이 발전하면서 양성의 구분이 명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다.(Fevre & Bancroft, 145) 이들 또한 사회적 성의 구분 아래서 사회가 강요하는 ‘남성성’의 피해를 받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남자는 털털해야 한다, 남자가 너무 깨끗하거나 섬세하면 못써’라는 말들은 사회가 주입하는 전형적인 남성의 신화(남자다움)에 해당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인권의 남성에 대한 일반화는 남성 집단 내의 다양한 방식의 젠더를 내재하고 있는 남성들에게 보편적 ‘남성성’을 다른 방식으로 주입하는 격이 된다. ‘남성’은 어떠할 것이라고 단정 짓는 행위는 그 자체로 젠더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하는 행위인 것이다.

 

     과연 모든 남자는 본인의 젠더에 대해 궁금증을 표출하지 않을까? 여성이 사회적 금기와 권유사항을 듣고 자라는 것처럼, 남성 또한 그러한 권유사항들을 분명히 듣고 자란다. 게다가 유년기 남성에게 가해지는 대부분의 권유 사항과 금기 사항은 인간의 본능을 거역하라는 식의 강제성을 담고 있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 남자는 레이디 퍼스트를 실천해야 한다’ 가 그 예이다. 이러한 것들을 따르지 않는 남성은 사회에서 소위 ‘찌질한’ 남성으로 낙인 찍힌다. 더 나아가 이 낙인은 본인을 남자라는 존재로 이해하는 사회적 거울을 들여다본 경험이 없는 다수의 남성들에 의해 더 강한 폭력성을 띠게 된다. 강요 받는 남성성과 생물학적 성(sex)의 중간지점에서 자존심의 큰 스크래치가 찍힘으로써, 젠더와 성(sex)에 대한 강한 혼란과 정신적 고통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 고통은 강한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것은 성인이 된 후에도 분명히 영향을 미치는데, 그렇다면 전인권의 주장대로 남성은 성인이 된 후에도 본인들이 만들어진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는가? 전인권은 문제적 인간상인 다수의 ‘아저씨’를 예로 들며 그렇다고 주장한다. 남성다움을 모든 남성이 쫓고 있다는 식의 전제는 남성다움 판타지의 재현 공간인 ‘군대’에서 정점에 이른다. 군대는 이 전제를 바탕으로 모든 남성들에게 천편일률적으로 아주 강력하고 억압적인 젠더 폭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서 또 한 번의 낙인을 찍힌 (남성성을 거부하는) 남성들은 더 이상 갈 곳을 잃었기 때문에 그 고통의 책임을 ‘군대를 가지 않는 여성’에게 돌리는 이상한 과오를 범하게 된다. 결국 여성 혐오의 또 다른 재생산 메커니즘을 한국 사회의 ‘남성성 강요’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전인권의 일방적 주장은 매우 협소한 시각에서 바라본 일반화의 오류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민감성이 떨어지는 ‘둔감한’ 남성들에게 해당하는 지적이라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개인에게 기대하는 성 질서는 인종 질서, 계급적 편견 등과 결합하면서 더 강한 폭력성을 띠게 된다. 그런데 그 폭력은 이성에게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고 동성 내에서도 작용할 수 있다. 또한, 과연 사회적 성을 거시적으로 구분하여 바라봐야 하는가라는 의문도 남는다. 성은 개인에 의해 재창조되듯이 미시적 접근의 중요성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남성에게도 가해지는 ‘남성성’의 폭력을 보며, 긴 역사 속에서 지금껏 대다수의 여성이 ‘남성의 타자로서’ 무참한 젠더 폭력을 당해왔던 역사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껴야 한다. 우리가 타국에 대해 과거사에 대한 끊임없는 참회를 요구하듯이, 젠더 폭력의 반성적 자세는 개인적 영역과 사회적 영역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성찰적 자세를 겸비한 채, 젠더 트러블을 통해 지금껏 권위주의 사회가 강요했던 젠더 정체성을 해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통해 요원할 것만 같아 보이는 평등한 이상 사회로의 발판을 구축하려는 새로운 사회적 움직임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본 글에 대한 저작권은 저에게 있습니다. 저자의 허가 없는 무단 배포, 복사, 복제는 금합니다. / 2017년 초에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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