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사유와 영화 - <태양 없이(Sans Soleil, 1982)>
구 동 완
연세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
크리스 마르케의 기억
우리는 크리스 마르케의 ‘기억’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기억’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왜 영화를 통해 이야기되어야 하는지를 먼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을 지각하는 방법에 니체의 사유체계와 플라톤의 체계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존재론적인 우리의 지각 체계에 경종을 울리는 사유의 시작이라면 우리의 기억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인가? 크리스 마르케의 기억(존재론적 진실)은 철저히 현실에 기반한다. 그 기억은 인간이 주체가 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과거의 존재는 현실 속 실체적 인간에 의해 기억되고 왜곡되며 망각된다. 때문에 마르케적 사유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먼저 ‘기억’ 자체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중국, 러시아, 쿠바, 이스라엘, 아프리카, 일본... 그의 관찰 대상이 되는 나라들은 하나같이 전쟁이나, 분쟁, 혁명 등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마르케가 이들 나라를 찾는 순간은 대부분 전쟁이나 혁명의 역사는 망각된 채 땅속에 묻힌 후다.... 영화에서 그가 마주치는 일본과 아프리카의 모습 역시 그에게는 해독 불가능한 집단적 기억사실의 이미지들이다(이자혜, 2010).
역사에서 ‘기억’의 상기는 매우 중요하다. 인류는 늘 기다란 시간 속에서 늘 죽음과 탄생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숙명의 길을 걸어왔고, 이는 ‘망각’을 수반해왔다. 망각의 수반은 과거에 대한 온전한 이해 및 체험을 불가하게 만든다.
그에게 있어 ‘행복의 이미지’인 1965년 아이슬란드에서 찍은 아이들의 모습 그 자체로는 당시에 그가 느낀 감정까지를 담아낼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 그들을 마주쳤으며 그것이 왜 행복의 이미지인지를 설명해 내는 것은 기억을 다시 쓰는 것일 뿐,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이자혜, 2010)
망각에 의해 잊혀진 과거를 이미지로나마 상기하는 것은 이와 같이 기억을 다시 쓰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기억은 시간 앞에 처참할 정도로 무기력하다. 시간이 흐를 수록 기억은 파편화 되며, 사건의 인과율이 무너져 시간이 뒤섞여버리고 심지어는 시간을 뛰어넘어 먼 과거의 기억이 더욱 뚜렷하게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기억마저도 정지 이미지로 남아있거나 그 힘은 약해 질대로 약해져서 우리의 인생을 무뎌진 것으로 만든다. 영화에서 끊임없이 병치되는 일본과 아프리카의 이미지를 보라. 그 두 국가는 인류의 존속을 위협하거나 혹은 그러한 위협을 극복한 역사적 과거를 지니고 있다. 그러한 이러한 과거는 더이상 진실된 기억으로서 두 국민들에게 남아있지 않다. 이를테면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카미카제의 신화는 마르케가 보기엔 수정되어야만 하는 기억의 형태로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투쟁의 기억이 상실된 채 빈곤과 기아만이 남은 아프리카의 망각된 이미지(이자혜, 2010)”들은 진실로서의 기억이 부재된 상태다. 수정을 가할 필요가 없는 진실로서의(진실에 가까운) ‘기억’은 탄생과 죽음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인류의 숙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에 ‘마르케’는 영화를 통해 시간 속에서 망각을 극복하는 나름의 방법 제시를 통해 기억에 대한 사유를 유도하고 있다.
집단 기억상실증의 문제
“평생 기억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숙고하게 될 거야.망각의 반대어라기보다는 그 안팎으로써 역사를 재기록 하듯 기억을 재구성 하지는 않잖아”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주류영화는 기억 이미지의 조합물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기억하는 방식을 기만하는 형식이기도 하다. 다시말해 엄격한 인과성에 기반한 선형적이고 심지어 시간의 망각 조차 뛰어넘는 이미지의 직조는 우리가 집단적으로 기억 상실을 겪고 있음을 은폐시킨다. 이를테면, 몽타주에서 시간과 공간 사이의 수많은 간극이 존재하지만 그 간극을 내러티브가 지니는 인과율의 힘을 빌려 선형적이고 명료한 이미지의 추동력을 갖게 만든다. 그것은 직관적이기에 강력하다. <태양 없이>는 이러한 이미지의 직조가 우리의 기억을 어떻게 지배하고 왜곡시켜 기억 자체에 대한 사유를 중단시키고, 진실된 과거와의 대면을 불가하게 만드는지 일본 텔레비전의 프로그램과 TV가 나열된 이미지를 통해 아래와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텔레비전을 응시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것(텔레비전)으로부터 응시 당하는 느낌을 받게 되지. (...) 나는 소위 성인들을 위한 심야 방송 프로그램까지 섭렵했어. 만화책과 마찬가지인 위선이 거기에 있어. 하지만 그것은 약호화된 위선이야. 검열은 볼거리의 삭제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볼거리야. 약호가 곧 메시지인 것이지. 중요한 것은 가림으로써 절대성을 드러낸다는 것, 그것이 바로 종교가 늘 해왔던 일이기도 해”
일본의 집단적 기억상실을 유발하는 것은 바로 진실을 은폐하는 이미지, 즉 텔레비전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거짓 이미지들 때문이라 지적한다. 그 이미지들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재생산하는 통제된 이미지들인 것이다. 이러한 통제 행위 자체가 메시지가 되어버린다(이자혜, 2010). 다시말해 고도로 문명화 되어 사유와 성찰의 가능성이 풍부한 일본이 오늘날 통제 행위를 통해 어떻게 (기억 상실에 의한) 사유의 가능성을 상실하는가에 대한 지적이다. 하지만 분명 그들의 행위와 이미지에는 비 가시적인 과거의 진실이 녹아있다. 이를 테면 영화의 도입부 시퀀스에서 페리에 탑승하여 잠을 청하고 있는 승객들을 보며 말한다. — “묘하게 과거나 미래의 전쟁이 연상돼. 밤 열차, 공습, 방사능 낙진 같은 전쟁 속의 일상의 편린들이”.
기억상실의 원리와 영화
크리스 마르케는 왜 영화를 통해 기억을 사유하였는가? <태양 없이>는 주류 영화와는 분명히 다르다. 일본과 아프리카라는 대비적인 공간이 나레이션으로 제시되지만 어떤 이미지가 일본이고 아프리카인지 구분할 길이 없다. 다른 시공간의 이미지는 병치되고 뒤섞여 대위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나아가 중간중간 검정화면이 등장하는가 하면 도중에 영상이 사진처럼 정지되기도 한다. 전개에 있어 인과법칙은 무의미해지고 모호함의 연속이기도 하다. 기억은 망각을 수반하기에 그 둘의 관계는 분리된 대립적인 관계라기 보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통합된 행위다. 찰나의 현재 그 어떤 순간도 시간 앞에선 무기력하게 망각된다. 지각하는 행위(현재)와 기억(과거)을 생각해보자. 현재를 지각하는 것은 과거 행위들의 누적이 있기 때문에 명료해진다. 하지만 현재의 지각을 위한 과거의 기억들은 무의식적인 선에서 호출되고, 의식적인 기억 회상의 행동은 결코 명료하지 못하다. 기억들은 <환송대, LA JETÉE>와 비슷하게 대부분 정지 이미지로 분절되어 있고 그 분절 이미지의 간극을 검정 이미지들이 메우고 있다. 그리고 그 시점이 먼 것일수록 왜곡의 정도는 심하고 인과율의 성립 가능성은 극도로 낮아진다. 때로는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분절된 기억들은 수시로 정지된다.
우리 기억의 한계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기억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곧 기억 그 자체에 대한 사유의 시작이자 반복적인 기억 상실의 자각 행위이기도 하다. 마르케가 주류 영화의 서사를 따르지 않고 편지를 매개로 시공간이 서로 다른 기억을 직조하는 에세이 다큐 멘터리를 만든 것은 기억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야 말로 이 세계의 기억을 명료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즉 기억은 마치 헤게모니를 지니는 주류 영화의 서사처럼 단층위적이고 결코 명료하지도 않다. 이를테면 영화 속 그는 카미카제에 가담했던 우헤하라 료지가 쓴 아래의 편지를 언급한다.
“나는 늘 일본이 영속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우리 카미카제들은 기계다 ... 그러나 지상에서는 감정과 열정이 있는 인간이다. 좀 횡설수설 하는 것 같다. 왠지 울적한 인상을 남기는 것 같지만 마음 속으로 나는 흡족하다”
저 나레이션이 나오는 카미카제의 장면들은 신시사이저로 작업한 - ‘과거를 바꾸는 행위’를 거쳐 제시된다. 적어도 신시사이저로 변형된 이미지는 ‘놓쳐버린 현실에 대한 간략한 압축 형태’도 아닐 뿐더러,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분명한’ 것들이다. 이것은 강력한 헤게모니를 지니고 이데 올로기가 투영된 하나의 통제된 형태로서의 TV보다는 덜 ‘가시적‘인 것이다. 한때 인류의 존속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던 그들에 대해 애국심의 상징으로써 기억하게 만드는 TV의 강력한 시선은 이데올로기의 권력에 의해 직조된 육감적인 이미지의 총체에 불과하다(들뢰즈는 오늘날의 영화가 일상에서 벗어나 의식화 되어 육체적인 영화가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든 카미카제들이 전체주의를 지향했던 것이 아니듯이 진실된 기억은 분명 다층위적이다. 영화의 모호하고 혼잡함의 서사는 바로 진실된 기억의 이러한 성질을 반영하는 듯 하다. 그리고 비사우의 케이프 베르데 시장에서 카메라를 의식한채 무심결에도 찍힐 각도를 유지하였지만 눈을 깔고 있었던 한 여인. 그녀는 1초라는 짧은 시간일지라도 진실된 시선으로 카메라를 응시하였다. 그리고 그 1초의 찰나는 신시사이저를 통해 영속화 된다.
상실된 기억을 회복하고 현재의 기억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기억 그 자체에 대한 사유로의 접근을 열어놓아야 한다. 또한 그것은 ‘영화’라는 이미지로 재현되었기 때문에 이미지의 속성에 대한 이해도 필요로 한다. 크리스 마르케는 ‘기억’에 대한 사람들의 사유를 유도하기 위해 인간의 기억 메커니즘을 서사 구축의 방식으로 사용했다. 영화의 모호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억에 대한 사유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기억 구축의 핵심 요소인 ‘이미지’가 지니는 비 가시적 영역의 진실은 어떻게 가시화 시킬 수 있는가. 그는 영화에서 멀티미디어 사회에서의 이미지의 위치를 희화시켜 고찰하는 방식을 택하였다(심은진, 2006). 뿐만 아니라 이미지가 어떻게 사람들의 내면을 투영해 내는지를 다양한 몽타주를 통해 보여준다.
기억에 수정을 가하는 영화
시간에 의해 처참하게 무뎌져가는 인류의 감각과 기억을 명료한 이미지로 수정을 촉구할 수 있는 것은 영화 뿐이다. 더군다나 집단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영화는 더욱더 탁월한 매체가 아닐까. 빈곤과 가난이라는 현실적 이미지의 힘에 압도되어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기니비사우의 현재에 영화야 말로 물리적인 촉구(힘)를 가할 수 있는 최고의 도구다. 기니비사우의 독립 항쟁을 주도한 아미카 카브랄(Amilcar Cabral)이 꿈꾸던 국가, 스스로 독립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포르 투갈의 독재 정부를 전복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그리고 유럽에 새로운 혁명의 기대를 심어 주 었던 그 나라 기니비사우의 남루 한 현재의 모습에 크리스 마르케는 기니비사우와 함께 독립 투쟁을 했던 케이프 베르드의 음악인 모르나(Morna)를 더빙해 붙인다(이자혜, 2010).
<태양 없이>는 어쩌면 두 당사자(일본과 아프리카)에게 헌사하는 크리스 마르케 감독의 작품일지 모르겠다. 기억은 본질적으로 사적인 성질을 갖는다. 기억의 변주 또한 주체(당사자)에 의해서 일어난다. 하지만 주체 스스로에 의해 왜곡되고 진실성을 상실한 기억은 다시 회복에 이르기가 힘들다. 기억이 지니는 진실성(당사자의 과거를 직시하고 정체성을 회복하는)의 힘은 주체가 아닌 타자에 의해 다시금 상기되어질 때, 그제서야 자신을 돌아보는 방식으로 명료해진다. 기억은 본질적으로 파편화 되어진 제한된 기억을 지닌 주체에 의해 보존되어 특정한 방향으로 수렴해나가기 때문이다. 지향점을 향해 기억은 주체의 합리화에 의한 변주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태양 없이>가 지적하듯이 ‘집단 기억 상실’이 일어나는 지점인 것이다.
“... 한 순간 유럽에 새로운 혁명이 가능함까지 믿게 만들었어.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누가 기억 하겠어? 역사는 자신의 빈 병들을 창밖으로 내던져버리거든.”
시간(역사)에 의해 내던져진 그들의 정체성을 되찾아주고, 강력한 이데올로기의 온갖 이미지들에 의해 왜곡되어버린 그들의 기억을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영화가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상업주의 의식(cérémonie)에서 벗어나 그들의 일상으로 회귀할 때, 관객은 비로소 사유를 시작 하게 되고 그것은 인류의 진보로 나아갈 수 있다.
영화 속 아이슬란드의 가장 행복한 순간들과 그 찰나의 기억을 흔적 없이 덮어버린 화산재의 몽타주. 그리고 영속화 된 케이프 베르데 여인의 응시.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참고문헌
이자혜. (2010). 크리스 마르케의 〈태양 없이 Sans Soleil〉에 나타난 시간의 재현 방식 연구. 한국프랑스학논집, 72(), 567-589.
심은진(SHIM Eun-Jin).(2006). 크리스 마르케르 Chris Marker와 Coréennes. 프랑스학연구, 36(): 6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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