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운동성에 대한 몰입된 체험
구 동 완
뤼미에르 형제의 많은 영화들은 스크린 속 배우들의 실천이 내러티브의 핵심이 되고, 우리는 그들을 엿보듯이 바라본다. 그런데 유독 <열차의 도착>을 보면 출연자들의 실천은 기차가 도착할 때까지 유보되며,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도 열차가 역에 완전히 정차했을 때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 기계문명의 발달에 따라 우리의 가시적 삶은 운동의 연속과 함께였다. 실제로 우주를 항해하는 거대한 우주선, 수평선으로 끊임없이 펼쳐진 기찻길을 달리는 기차,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을 비롯해 우리는 많은 영화들에서 선형적으로 공간을 운동하는 거대한 물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폴 비릴리오는 소멸의 미학에서 “철도, 자동차, 제트기, 전화, 텔레비전 등 우리의 삶 전체는 더 이상 의식도 못하는 그런 가속도 여행 기계들에 의해 흘러간다”고 하였다. 우주적 관점에서 우리는 궤도운동을 하고 있는 행성의 일원이며, 지구는 태양계에서 궤도운동을 하는 일원이자 우리 태양계도 은하 내에서는 궤도 운동의 일원이다. 모든 것은 운동을 하지만 그 운동에 의한 이동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정지적 영상으로 가시권에 들어왔고, 우리는 그 안에서 실천을 해왔다. 실천은 일종의 운동의 배제이자 동시에 관람하는 것 혹은 관측되는 것이다. 특히 운동이 선형적으로 가시화 되었을 때, 그리고 그것의 벡터가 매우 강해질 때 우리는 실천으로부터 배제되기도 한다.
영화는 일종의 선형화 된 타임라인 속 이미지의 운동이자 이동이다. 관객은 어두운 영화관에서 숨죽인 채 스크린에 펼쳐지는 이미지의 운동을 관람하는데 운동을 바라보는 관객은 어떠한 실천도 할 수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영화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지각하는 태도도 비슷하다. 우리의 눈은 실제로 수많은 시각적 정보를 받아들였을 때 상당한 피로함을 느끼는데, 일종의 동적 정보에 의한 인지과부하가 발생하여 그에 상응하는 반응으로 우리의 지각은 둔해지고(받아들이는 정보를 최소화하고) 우리의 움직임은 정적으로 바뀐다. 특히 시각으로 감지되는 물체의 운동성의 힘이 거대하거나 혹은 수많은 파편화 된 물체가 동시에 운동성을 띌 경우 우리는 자동적으로 관람자의 관점을 가지게 된다. 기계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 비교적 정적인 이미지를 소비할 수 밖에 없었던 옛 사람들에게 가장 역동적인 스크린은 천문 현상이었던 것 같다. 천문 현상은 그 자체로 거대한 운동성의 힘을 내포하고 있으며, 수많은 파편화 된 별들의 연속된 운동성은 우리를 관람자 내지는 관측자로 만들어버린다. 나아가 거대하게 압도하는 움직임의 이미지는 때때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거나 공포감에 사로잡히도록 만든다. 인간이 운동성보다는 정지된 것에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진화론적 생존 기제에 의해 물체의 운동성에 대한 우리 신체의 반응은 민감하고 기민하며, 이는 동시에 피로감과 불안함을 증가시킨다. 운동성은 곧 불안함의 연속이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가 대중에게 공개되었을 때, 관객들이 가장 흥미롭게 관람한 것은 스크린 속 사람들 보다는 배경에 있는 생생한 자연물의 움직임이라고 한다. 움직임이 생생하게 재현되는 것을 처음 접한 사람들에게 스크린을 통한 관찰의 신기함은 대단했을 것이다. 영화는 운동성을 재현하는데 있어 굉장히 탁월한 매체이기도 한 것 같다. 실재는 물체의 운동성으로 가득찬 정보의 집합체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시야 전체에 펼쳐져 있기 때문에 각 움직임의 힘은 그다지 강렬하지 않다. 우리의 인지 프로세스를 간소화하기 위한 뇌의 움직임도 한 몫 하겠지만 우리의 시야는 영화에 비해 정보의 응축된 형태는 아니다. 반면 영화는 프레임의 예술이다. 프레임은 우리의 시야를 집중시키고 움직임을 프레임 속에 응축시킨다. 그리고 모든 내러티브 정보는 프레임 속에서만 재현된다. 뤼미에르 형제는 이를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이미지의 군상은 공통적으로 프레임 중앙에서 응축된 형태로 재현된다. 당시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를 일종의 관찰적 도구로써 대중들이 접한다면 마술을 보는 것 같은 놀라움을 선사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때문에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들은 피사체의 운동성과 동시에 관찰자의 몰입된 경험을 극대화하기 위해 카메라는 운동성의 관찰 주체로서 완전히 정지해있다. 영화의 탄생과 동시에 이미 사물을 관찰하기 위한 최적의 형태로 구조가 짜여져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영화의 발명과 동시에 매체의 운명에 필연적으로 새겨진 유전자인 것이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는 하나 같이 응축된 움직임을 관찰한다.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의 경우 그 응축된 움직임이 뤼미에르 형제의 의해 철저히 연출되었음을 알 수 있기도 하다. 폴 비릴리오는 <소멸의 미학>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는데,
“차량의 움직임이 만들어 내는 환영을 보는자-여행자에게 차창을 스크린 삼아 그 너머로 자기 고유의 환각들을 투사하게 만든다. 아주 머나 먼 장소에도 갈 수 있게 되었지만 보는 자-여행자는 협소한 감방 같은 자동차의 좌석에 웅크려야만 평정을 되찾았다. …중략… 갇힘이기보다 파묻힘이고, 창문 없는 지하 감방에서 낮의 빛은 소멸되는 것이다.”
움직임을 보는 것은 일종의 관찰 내지 관측하는 형태를 띄게 되는 것이며 우리는 속도를 갖는 교통수단에서 이러한 바라보기 형태에 익숙해진다. 창문을 통해 끊임없이 운동성을 관찰하는 행위는 우리의 일상을 통해 바라보기를 영화 관람에 최적화 된 형태로 체득시키는 연습인 것이다. 이러한 바라보기 형태는 보는 자로 하여금 가장 이상적인 관찰(관람) 태도이며 이는 동시에 평정을 되찾게 만든다. 움직임을 바라보는 최적화 된 형태는 한편으로 우리에게 쾌락을 선사하기도 한다. 아래 폴 비릴리오의 언급은 운동성을 바라보는 행위가 지니는 위험(불안함)과 안락함(쾌락)의 공존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든다.
“남자들은 이동 자체를 삶의 양식, 고정성으로 추구하게 되며 위험과 안락함을 연합한다.”
뤼미에르 형제의 또 다른 영화 중 <벽을 무너뜨리는 사람들>은 현대 영화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펙터클한 폭발 장면들의 모티브로써 “일상적인 감각의 순서와 정보가 도착하는 순서를 노골적으로 망가뜨림으로써 … 사고의 폭력을 끝없이 재생하며 인간을 주체적 시공간 밖으로 납치하는 강한 자극을 영원히 되풀이”한다. 폭발을 실재에서 관찰하는 경험과는 완전히 다르게 정보를 재편성함으로써 영화는 우리를 새로운 관찰자적 주체로 만들기도 한다. 즉 운동성을 재현하는 시간과 속도를 조작함으로써 그렇게 만들어진 시각적 이미지는 응축된 운동성을 관찰하는 형태에 최적화되어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관찰 주체로 호명하는 것이다.
다시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으로 돌아가보자.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장면은 열차가 가지는 벡터의 거대한 크기로 인해 굉장한 운동성을 보여준다. <열차의 도착>에서 열차가 보여주는 운동성은 여타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운동성과 비교하여 그 힘이 관객을 향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다. 운동성은 앞서 필자가 주장했듯이 우리로 하여금 관찰자로 만드는데, 그 운동성의 벡터가 클수록 즉 응축된 힘의 운동이 강렬할수록(특히 그 힘의 방향이 관객을 향할수록 혹은 관객의 시선 방향과 일치할수록) 관찰 행위의 몰입도는 극대화된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압도당하는 느낌을 선사한다. <열차의 도착>에서 플랫폼에 대기 중인 사람들은 열차가 멈추기 전까지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비로소 열차가 멈추고 운동성이 줄어들었을 때 사람들은 실천을 시작하며 관객에게 삶의 주체로서의 안락함을 부여한다. <열차의 도착>에는 이미 거대한 벡터를 지니는 물체의 운동성에 대한 경외감이 영화 속에 내재되어 있었고 그것은 곧이어 관객에게 전이된다. 현대의 많은 공상과학 영화들에서는 <열차의 도착>과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피사체의 운동성이 촉발하는 경외감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공상과학 영화의 내러티브 전개는 카메라가 주체성을 획득하고 파편화 된 움직임을 관찰할 때 이루어지는 반면, 우주선과 같은 거대 피사체의 응축된 움직임이 발생되면 즉시 내러티브는 중단된다. 우주선이 등장할 때에는 카메라가 주체를 가지고 있다기 보다 움직이는 물체에게 주체성이 양도되며, 주체성을 상실한 카메라 즉 관객은 내러티브가 중단된 채 운동성의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이는 관객에게 굉장한 경외감을 선사함과 동시에 수동적 바라보기를 형성하게 된다.
열차가 도착하고 곧이어 뤼미에르 형제는 열차에게 양도되었던 주체성을 다시금 원래의 주인이었던 카메라(관객)에게 돌려준다. 열차에 주체성을 부여시킨 채 영화를 중단시킬 수 있었음에도 뤼미에르 형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거대한 응축된 운동성의 힘으로 대표되는 열차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탑승해 있었는데, 열차가 플랫폼에 멈춤과 동시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파편화 된 행동들이 곧이어 열차를 완전히 제압함으로써 관객에게 대리적인 안락함을 제공한다. 이는 관찰의 주체성을 회복했을 때의 안락함이 아닐까. 이를테면 천문학은 거대한 우주적 움직임에 대해 인류가 완전한 제압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실이다. 인류가 지식의 축적으로 천문 현상을 정복하지 못했을 때 그것은 신이 노여움의 표출하는 것이자 복종과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지곤 했다. 운동성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굉장한 불안감과 공포감을 주기 때문에, 하루빨리 그것을 정복(제압)하려는 욕구는 안락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우리의 시각적 본성과도 같다.
이윤영 교수는 영화 <킹콩, 1976>이 개봉할 당시만 해도 인류에게 아직 개척되지 못한 대륙이나 섬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궁금증과 공포감을 자극하는 미지의 세계처럼 여겨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에 따라 지구상의 모든 대륙이 완전히 정복되면서 미지의 세계는 무한한 우주 공간으로 확장되었다. 우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많은 공상과학 영화들에서 우주를 미지의 세계이자 공포의 대상쯤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 바로 우주선의 등장 순서이다. 즉 <열차의 도착>이 관객에게 주체를 부여하는 작업을 거치지 않은 채, 거대한 벡터와 운동성을 지닌 열차에 주체성 먼저 부여했던 것처럼 많은 공상과학 영화들은 거대 우주선을 초반에 등장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주체성이 확보되지 못한 관객들은 처음부터 거대하고 강렬한 운동성과 직면함으로써 공포에 사로잡히고 동시에 경외감을 갖게 된다. 이 경외감은 영화의 배경인 우주로 확장되어 결과적으로 미지의 세계로써 우주가 갖는 상징성을 강화시킨다.
관객이 피사체에 주체를 양도하는 과정없이 운동성으로부터 주체를 쟁취해오게 만드는 전략은 공상과학 영화에서 꽤나 효과적인 것 같다. 특히 공상과학 영화의 경우 실제 세상과는 확연히 다른 공간 구성을 통해 이국성을 강화시키는 이미지들로 가득 차있다. 때문에 처음부터 운동성에 부여된 주체성은 관객들이 공상과학 장르에 갖는 스펙터클에 대한 기대감을 확실하게 충족시켜주며, 이를 통해 공상과학 영화만의 이국성를 구축하게 된다. 컴퓨터그래픽을 통해 공상과학 영화의 이국성이 더욱 강화되고 있는 지금 이러한 경향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영화 <2001 :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아바타>, <프로메테우스>에 이르기까지 우주를 배경으로 한 공상과학 영화들이 내러티브를 중단시키고(혹은 내러티브 전개 전부터) 운동성에 주체를 부여하는 시점은 점점 더 러닝타임의 초반으로 수렴해간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Solaris>가 공상과학 영화의 이국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동원했던 다양한 방법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거대한 운동성이 주체성을 띄게 된다면, 파편화 된 운동성은 영화에서 어떻게 구현되는가. 거대한 운동성은 파편화 된 운동성에 비해 비교적 속도감을 갖지 못한다. 즉 거대한 크기의 벡터는 프레임(스크린)의 물리적 한계상 느린 운동이 되어버린다. 반면에 파편화 된 운동성은 속도감이 시각적으로 뚜렷해진다. 파편화 된 운동성은 강렬한 속도감으로 인해 우리에게 시각적 피로감과 불안감을 급증시키지만, 동시에 속도적 쾌락을 선사한다. 또한 거대한 운동성에 비해 관객이 주체성을 획득할 가능성이 상당히 커진다. 운동성을 갖는 파편화 된 피사체는 카메라로 하여금 정적인 태도를 취하게끔 만드는데 이로 인해 관객의 관찰 욕구와 범위는 자연스레 커지게 되는 것이다. 천문 현상이 수많은 파편화 된 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관찰자는 파편화 된 움직임의 중심축으로써 관찰 행위에 주체성을 부여 받게 된다. 뤼미에르 형제의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을 비롯한 많은 영화들이 피사체로 하여금 타자화 시키는 즉 카메라가 주체성을 갖게 되는 양태를 띤다. 많은 영화들은 주로 파편화된 움직임을 관객들이 관찰하게 함으로써 다양한 내러티브 정보들을 전달한다. 파편화 된 움직임을 바라보는 형태는 곧 엿보기 형식이 될 수 밖에 없다. 엿본다는 것은 관찰, 관측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면서 주체성을 갖고 있는 관객에게 안락함을 준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시간의 선형적인 운동을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적인 안락함을 추구하다가도 그것의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적인 것을 추구한다. 그 욕구가 반영된 것이 영화 관람이라면 운동성을 관찰하는 주체가 정적인 상태에서 운동성에 대한 온전한 몰입이 가능한 환경이 구축되어야 한다. 때문에 영화는 운동성을 관찰하는 것이지만 그 운동성은 정적인 공간 안에서 오로지 스크린에 투사되어 매우 제한적인 형태로 몰입도 높게 이뤄진다. 이러한 관람 형태는 관찰자가 주체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자연스레 구축된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뤼미에르 형제의 최초의 영화들에는 ‘운동성을 바라보기’란 행위가 갖는 관찰의 성질을 이미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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