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지체된 시각의 확장 기계, 영화 - 지가 베르토프, <카메라를 든 사람>
구 동 완
연세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
역사를 곱씹어본다는 행위는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그동안 제도 교육은 ‘역사’라는 학문적 카테고리를 만들어 이를 학습하는 학생들에게 역사적 지식에 대한 헤게모니를 부여하도록 만들었다. 헤게모니의 부여는 ‘역사’에 대해 바라보고 천착하는 행위가 우리의 일상과는 거리가 있는 그 무언가로 향유하게끔 만든다. 그렇다면 역사는 무엇인가. 역사는 당대의 주체인 인간이 어떻게 세상을 추동 시켜 왔는가에 대한 궤적이 아니던가. 즉 추동의 궤적으로써 역사는 현재가 과거와 미래의 불확실성의 연장선상 속 한 가운데에 놓여 있음을 명확히 한다. 그 불확실성에서 궤적의 관성은 작동되며 동시에 그 연장선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움직임에 의한 관성의 이탈이 발생하고 관성 그 자체를 완전히 흐트려 놓기도 한다. 우리는 흔들리고 제멋대로 그려지는 끈의 종착점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 끈의 궤적은 수많은 위대한 업적들(추동력)에 의한 관성들의 집합이다. 추동의 궤적을 고찰하는 것은 역사가 수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로써 선형적 결과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때문에 역사 그 자체에 대해 고찰하는 행위는 수많은 사건들이 갖는 추동력이 각각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 사건들의 영향력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음을 직감하는 과정이다. 때문에 고찰의 행위는 자연스레 역사를 추동 시켜 온 이들의 도약에 대해 경탄의 감정으로 우리를 도취시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카테고리로써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혹은 숙명적으로 헤게모니를 지니게 되는 것인가.
과거의 궤적은 역으로 관성을 탈피해 불완전한 미래 속에서 새로운 움직임을 추동시키는 중대한 모티브가 된다.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람>은 그러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나는 <카메라를 든 사람>을 보고 이 영화야말로 정교함과 세련됨의 극치를 보여주는 현대 영화들 속에 내재된 관성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어쩌면 지금의 가장 상업적인 모든 헐리우드 영화들은 이미 90년 전에 완성된 <카메라를 든 사람>의 아류작에 불과한 것인지 모르겠다. 지가 베르토프의 선구자적인 천재성은 영화사를 아주 강력하게 추동 시켜 온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자 영화라는 매체가 미래에 구현해 낼 이상향의 구축을 끝낸 인물인 듯 하다. 다시 말해 그의 구축은 영화가 지닌 가장 본성적이고 필연적인 성질을 꿰뚫는 과정이다. 카메라는 인간이 가진 부동의 시각이 자유롭게 확장된 감각으로써 카메라가 있는 곳은 곧 인간이 존재 가능한 곳이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컴퓨터 그래픽의 힘을 빌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로 확장된다. 즉 지가 베르토프는 카메라를 통해 시도해 볼 수 있는 모든 실천과 시각적 응시를 담고자 삶으로 침투하였다. 이는 카메라가 대중화되면서 생산될 이미지들의 근본적인 모티브를 담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앞으로 모든 곳에서 카메라의 눈을 통한 새로운 미학적, 예술적 시각을 통한 사유의 가능성이 펼쳐질 잠재성을 내재한 행위가 된다. 그동안 영화는 우리의 삶 곳곳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비단 시각적, 예술적 유희 뿐 아니라 언어와 같이 지식이 가공된 하나의 형태로써 우리에게 전달되기도 한다. 어쩌면 카메라가 대중화되면서 어디에나 있는 인간의 눈을 확장시켜 줄 ‘키노-아이’의 숙명인 것이다. 지가 베르토프는 “키노-아이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필름-눈, 즉 <키노 프라우다>(진실 영화)의 가능성과 수단을 통한 진실을 위해서다.”(김영란 역, 2006)라고 말하였다. 다시 말해, 지가 베르토프가 인간의 눈이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에 나아가 카메라를 들고 삶에 침투하려고 한 것은 카메라의 눈으로 우리의 감각을 확장시킴으로써 지식(영화 진실)의 외연을 확장하고, 그것이 곧 사유에 변혁을 일으킬 선언인 것이다. 영화 <카메라를 든 사람>에서 사회적으로 금기시 되어지는 출산의 과정(여성의 성기에 대한 노출)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키노-아이가 지니는 시각의 무궁무진한 확장성과 사회주의 혁명의 이상향 – “카메라의 눈이 모든 곳에 스며들어 시점을 다수화시키고, 공간의 모든 점을 시점화”(이지영, 2005)하여 노동현장에 키노-아이를 돌려 놓는 행위- 을 은유적으로 제시한다. 영화가 기존 연극(내러티브 서술 매체)의 연장선상으로써 귀족주의의 유산인 기존 예술 사조에 머무는 것에 대한 저항(지가 베르토프는 “인간과 사물의 진정한 해방을 가로막고 있는 요소로서 부르주아의 낡은 이데올로기를 지목한다”.(이정하, 2009))이자, “세계를 공산주의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전투를 촉진시키기 위해 뉴스릴과 과학의 동맹이며, 화면 위에 진실-영화-진실을 보여주려는 시도”인 것이다.(김영란 역, 2006)
우리의 감각은 지식과 정보의 원천이다. 특히 시각은 정보를 바탕으로 사유를 구체화시키고 정형화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인간의 시선은 ‘아직’ 물질의 운동(세계의 물질적 현존과 그 물질들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일)을 ‘지각’하고 그 운동의 적확한 의미를 ‘해석’하기에 미숙하다. 다시 말해 인간의 지각은 ‘이미’ 현전하고 있는 물질 발전 단계에 아직 미치지 못하며, 역사적으로 지체되어 있다.”(이정하, 2009) 때문에 지가 베르토프는 “인간의 시각 체계를 보완하고 대체할 수 있는 또 다른 기관, 혹은 ‘기계’가 필연적으로 요청”된다고 보았다. “볼셰비키 혁명이 선취하고 성취한 ‘현 단계’ 소비에트 사회는 베르토프 자신이 과거에 변증법적 유물론의 전망 하에서 ‘미래’에 쟁취하고자 열망 했던 사회”(이정하, 2009)이지만, 현실에서는 “이념의 구현과 실재 사이의 지체가 존재”(이정하, 2009)하므로 이러한 간극을 지각하고 해석 및 조직하는 것으로 좁히기 위해서는 본래 인간의 눈의 기능인 “지각의 차원뿐만 아니라, 해석, 해독함과 동시에 ‘구축’, ‘구성’, ‘조직’하는 지성”(이정하, 2009)의 확장된 기계로써 키노-아이를 필요로 한다. 때문에 베르토프는 <카메라를 든 사람>을 통해 변증법적 유물론의 정교한 몽타주로 소비에트 혁명 이후의 현실을 바라보도록 도와주는 영화만의 매체적 언어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영화는 모든 계급이 지식을 이미지로써 직관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새로운 언어이다. 동시에 영화는 지체된 인간의 눈을 훈련시켜 바뀌어가는 역사(진실)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교육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라는 목표 하에 이데올로기에 의해 은폐되어 있는 사실들을 드러내고, 일상적인 현실과는 다른 새로운 현실을 열어 보이는 것”(이지영, 2005)이다.
영화 <카메라를 든 사람>에서는 인위적인 내러티브 서사 구축을 위한 스튜디오(세트)와 연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키노-아이는 혁명으로 바뀐 현실(영화-진실)을 담아내기 위함이었고, 그것을 위해 우리 눈이 관측해내지 못하는 모든 것을 담아내고자 하였다. 영화 곳곳에서는 기계가 작동되는 메커니즘을 관찰한 반복적인 쇼트들, 기계 문명에 의한 가속의 세상 속에서 미처 놓쳐버리기 쉬운 각종 기계들의 흔적들과 현실의 단면들, 인간의 눈보다 훨씬 자유로운 운동성을 지닌 키노-아이를 통해 관찰되는 현실의 기하학적 이미지들과 몽타주들은 영화가 가질 수 있는 미학적 예술적 잠재력을 매우 세련되게 보여준다. 키노-아이는 시간을 지배할 수 있으며, 공간의 재구성을 자유자재로 가능케하므로 이것을 통한 시각의 확장성은 곧 사유의 확장과도 직결되는 것이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가 만들어지고 나서 90년이 흐른 지금, 다이내믹한 몽타주들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감각과 지성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게는 세상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가. 그동안 영화는 끊임없이 미래를 소재로 한 내러티브와 함께 새로운 가시적 이미지로 제시하였으며, 컴퓨터 그래픽이 동원되어진 기하학적 정교함은 영화가 현실과 분리되어 사유될 수 없도록 만든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물질들에 대한 반복적인 클로즈업 샷과 롱 샷은 인간의 사유 확장에 영화가 어떻게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가를 대표적으로 잘 보여준다. 미시와 거시 구조에 대한 인식은 시각적 상상이 지성을 통해 구축 되어야만 정교하게 작동할 수 있는데, 키노-아이는 그러한 시각적 상상의 가능성을 열어준 선구자로서 기능하게 된다. 90년이 지난 지금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서 구현된 갖가지 몽타주들의 실험을 보고 있으면 놀랍게 그지없다. 지가 베르토프는 쇼트와 쇼트 간의 지적 몽타주를 통한 변증법적 의미 창출뿐만 아니라 다양한 앵글로 촬영된 기하학적 이미지들의 병치를 통해 낯선 리듬을 형성하고 그것은 영화만이 가지는 미학으로 표현해냈다. 실제로 베르토프는 “지각에 ‘강한 압력(pression)을 줄’ 수 있을 만큼의 이미지가 ‘인상적’이어야만 의식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실용적’ 이유가 우선임을 강조”(이정하, 2009)하였으며, “앵글을 택할 때는 효율적인 각도, 즉 우리의 비전에 새로운 각도 – 우리가 아직 어떤 대상을 그렇게 바라보는데 익숙하지 않는 각도를 제시”(이정하, 2009)하고자 하였다. 동시에 그것이 반복되어지면 시각적 클리셰에 지나지 않게 될 수 있음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카메라를 든 사나이>의 초반부에 다양한 앵글의 쇼트들이 배치되어진 이유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베르토프는 한 쇼트 내에서 영상 이미지들의 합성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내고, 그것은 지적인 쇼트들의 생산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가령, 영화 시작과 동시에 보여지는 카메라 위에 올라선 카메라를 든 베르토프나 군중을 찍고 있는 거대한 카메라, 무성 영화로써의 한계를 시각적으로 극복하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스피커에 합성된 아코디언 연주자와 귀, 피아노의 이미지들은 “모든 민족과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간 시각적(키노-아이)이고 청각적(라디오-아이)인 계급 동맹을 구축”(오원환, 2014)하여 영화를 국제어로 만들어보고자 하는 시도였음을 잘 보여주는 쇼트들이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상영관 내부에서 시작된다. 한 사람이 릴 하나를 상영 기계에 장착하고 이후 수많은 의자들의 나열들이 보여지며, 북적이는 관객들이 의자에 차례로 앉는다.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은폐된 진실을 다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시각과 사유를 확장시키는 영화 매체의 소명을 몽타주로써 표현해낸다. 즉 베르토프는 개개인의 주관성이 영화의 해석과 수용의 주체가 되는게 아니라 집단적으로 소비되는 사회적 혹은 대중적 서술 매체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영화는 진실의 전달을 통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가장 과학적으로 진보된 시각적 지식의 응축체가 된다. 이러한 영화의 저력을 알고 있던 지가 베르토프는 왜 끊임없이 영화 속에 카메라를 등장시켜 매체 자체를 타자화 시키고 이를 관객에게 주지시키는가? 자기 반영 혹은 자기 성찰 태도는 영화를 노동자 계급에게 돌려 놓으려는 베르토프의 철학에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가 생산과 소비를 단절시킴으로써 생산자와 소비자를 고립시키는데, 영화의 생산과정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관객을 각성시키는 것이 혁명의 시작이다. 이는 훗날 9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영화가 소비되는 방식에 대한 성찰을 유도하는 것 같다. 정교한 몽타주와 거기에 곁들어진 컴퓨터 그래픽 기술은 관객으로 하여금 감정이입의 성공적 유인을 가능케 한다. <카메라를 든 사람>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을 렌즈에 비쳐진 눈(키노-아이)은 왜 바라보는가? 피를 흘리는 사람의 쇼트와 키노-아이 쇼트의 병치가 만들어내는 몽타주적 메세지는 무엇인가. 키노-아이는 결국 우리 시각의 확장이므로 시각이 가지는 근본적인 기능은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말하자면, 1차원적으로 들어오는 시각 정보를 우리는 생존적 기저에 의해 그것을 본능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이로 인해 자칫 감정이입 같은 방해요인들은 매체 인식 자체를 반복적으로 망각시키는 원인이 되며, 반복적 망각은 습관으로 고착화 된다. 때문에 키노-아이를 통해 세계의 진실을 적확하게 이해하는 도구로 삼을 순 있으나 동시에 이 역시 생산의 산물이므로 그 자체를 지각하게 하는 것은 시각에 대한 인식론적 성찰이자, 정교한 몽타주를 소비하게 될 미래 세대에 보내는 경고이기도 하다. 그래서 베르토프는 가장 몰입도 높은 타임라인의 한 가운데서 흐름을 갑자기 중단시키고 영화가 생산되는 불편한 진실을 적나라하게 들춰내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고는 가장 ‘인상적인’ 방식으로 관객의 의식에 충격을 준다.
지가 베르토프가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공개한지 9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영화에 대해 어떻게 성찰해야 하는가. 선형적인 역사는 그 시발점에 강력한 추동력이 있었을지 몰라도 도중에 끊임없이 흔들리며 멋대로 그려지기 때문에, 베르토프에 의해 추동된 관성은 지금에 이르러서 크게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영화가 가진 가능성과 잠재력을 기대하는 에너지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는 90년간 정교한 몽타주를 구축하였고, 어쩌면 영상 이미지가 일상처럼 소비되는 시대에 우리의 눈은 충분히 단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영화는 그동안 지체된 시각을 확장시키는 기계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 온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유는 영화가 탄생된 시점과 비교하여 크나큰 전환점을 맞이하였는가? 아니면 이미 90년 전에 이미 지가 베르토프가 구축해 놓은 영화의 역할 범주 내에서 그것을 충실히 수행해 온 것 만은 아닌가. 영화가 완전한 자본주의의 상품으로 소비되는 시대에 영화가 혁명의 주체로서 다시금 자리매김할 가능성은 매우 적어 보이는게 현실이다. 지가 베르토프는 90년 전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아가 영화가 수행할 수 있는 당대의 혁명적 소명에 대해 고민하였다. 하지만 영화가 무수히 많은 상품들 중 하나로 소비되는 현 시대에 그러한 고민은 더 이상 권태로운 대중들에게 흥미 거리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낡아빠진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
하지만 역사의 궤적은 끊임없이 흔들리며 제멋대로 다. 추동력의 에너지가 점차 소진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역사의 주체인 우리는 다시금 중대한 고민을 해야만 한다. 영화 길을 걷고자 하는 나는 고민해야만 한다.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참고문헌
지가 베르토프, <Kino eye: 영화의 혁명가 지가 베르토프>, 김영란(역), 서울: 이매진, 2006.
이지영. (2005). 이미지의 물질성과 내재성에 대한 연구 -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의 영화 이론을 중심으로 -. 시대와 철학, 16(1), 163-190.
이정하. (2009). 지가 베르토프의 ‘키노-아이(kino-eye)’에 대한 인식론적 고찰. 영상예술연구, 15, 9-32.
오원환, <다큐멘터리 스타일>,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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