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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映畫)/Film reviews

[감상 #2] 아나의 눈으로 구축된 모호함의 서사, 영화 <벌집의 정령>

by Dongwan. G 2020. 2. 26.

아나의 눈으로 구축된 모호함의 서사

모호함의 미학, 영화 <벌집의 정령>

 

구 동 완

연세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되는 1940년은 프랑코가 스페인 내전의 종결을 선언(1939년)한 직후 장장 40년간 이어질 스페인 권위주의 정권의 시작이 되는 시점이다. 프랑코 정권은 특정한 이념적 지향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공산주의자나 아나키스트, 공화주의자 등의 세력을 한데 묶어 좌파로 규정하면서 그들을 철저하게 탄압하였다. 게다가 1940년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있었던 시기인지라 스페인의 권위주의 정부의 집권과 더불어 국제적으로도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온갖 이념의 대립, 혼합, 이유 없는 죽음들의 연속, 혼란스러운 거대 질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현재 그리고 불안정한 미래. 스페인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극심한 불안정 속에 놓여있었다. <벌집의 정령>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지만 아나와 이사벨의 부모가 이러한 국내외의 혼란을 피해 은둔하고 있는 지식인층의 모습을 지칭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혼란의 시기 속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일상은 아나와 이사벨의 부모 마저 시골에 은둔하여 살게 할 정도로 어른들조차 매우 감당하기 힘든 삶이다. 세상의 불안정은 이사벨의 부모(어른들)을 염세주의자로 만들었고 가정에 소원하게 만들었으며, 그들에게 있어 순수성은 더 이상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된다. 

 

  영화의 최대 장점은 현실을 ‘재현’하는데 있다. 더 나아가 그 재현이 영화가 묘사하고 있는 다이제시스의 등장인물이 취하는 관점마저 ‘재현’시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즉 현실의 ‘재현’은 이미지의 재현에서 멈춰서는 안되고 몰입된 관객으로 하여금 다이제시스 안으로 불러들여야 한다. 우리가 스페인 전체를 감싸고 있는 혼란스러움과 극심한 불안감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스토리만으로는 부족하다. 관객이 다이제시스에 아무리 몰입된다고 한들 그것은 ‘바라보는 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등장인물의 관점까지 동기화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영화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는 형식이다. 형식을 보고 느끼는 관객에게 형식의 변주를 통해 등장인물의 관점마저 관객이 체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미지와 서사를 이용한 변주는 영화 ‘형식’이 취할 수 있는 최대 능력치이기도 하다. 때때로 이러한 변주는 영화가 제작되는 시기의 정치적 탄압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특히 스페인 역사상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을 듣는 <벌집의 정령>은 알레고리적 방식으로 정치적 의미를 표현하는 ‘새로운 스페인 영화(nuevo cine español)’의 전형적인 메커니즘이다. 실제로 <벌집의 정령>은 프랑코파에 저항하는 공화파 병사 maquis가 영화의 소재가 된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다(임호준, 2001). 영화는 작품이 만들어지는 시대를 어떤 식으로든 반영하게 되거나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므로 그 영화가 주조된 면모를 보면 시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모든 예술 장르가 그러한 숙명을 갖지만 다양한 예술적 장르가 혼합된 매체인 영화는 시대를 더욱 날카롭게 표현하곤 한다. <벌집의 정령>의 뛰어난 미학적 주조는 어쩌면 비참한 시대가 빚어낸 역설적인 아름다움인 것이다.

 

  정치적 탄압이라는 시대적, 국가적 질서를 교묘히 피해가면서 동시에 극심한 혼란스러움과 비참함에 대한 저항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때때로 탄압이 예술적 가능성의 지평을 열듯이 빅토르 에리세(Victor Erice) 감독은 그 해결책을 <벌집의 정령>오프닝 자막시퀀스에서 제시하고 있다. 영화는 아나가 그렸을 것 같은 아이의 그림의 나열로 시작된다. 각각의 그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공간’, ‘소재’, ‘시간’이 제시된다. 그것들은 영화적 세계관 즉 다이제시스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이다. 다시 말해 영화가 아나(아이)의 눈으로 세계를 구축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아나는 5살의 꼬마 아이다. 5살의 아이가 세상의 복잡다단한 원리들을 파악하고 명확히 인지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아이의 눈은 불안정하며 혼란스럽고, 다양한 자극들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또, 영화 속 미구엘이 테레사에게 말했듯이 강렬하기 때문에 쉽게 ‘큰 충격’을 받는다. <벌집의 정령> 서사 전반에 깊게 깔려있는 특유의 혼란스러움과 분명하지 않은 묘연함 그리고 불안정함, 이를 느리게 인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플롯들은 세상을 분별하기엔 아직 너무 어린 5살 꼬마 아나의 눈을 대변하는 듯 하다. 즉 플롯을 구축하는 카메라는 아나의 눈과 동일시 된다. 

 

  <벌집의 정령>의 다이제시스가 아이의 눈과 동기화 된 카메라로 구축되었다는 것을 마치 관객들에게 암시하듯이 영화관 시퀀스로 서사가 시작된다. 흥미롭게도 에리세 감독은 서사의 시작을 메타적 매체 인식을 통해 이 영화(<벌집의 정령>)를 보고 있는 관객이 누구인가를 지정하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이를 <프랑켄슈타인, 1931>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아이들의 ‘눈’의 반복적 몽타주로 제시한다. 즉 <프랑켄슈타인>은 <벌집의 정령> 전체의 서사를 반영하고, 영화를 보고 있는 아이들의 눈(정확하게는 아나의 눈)은 관객의 눈과 동기화 될 것임을 메타 구조의 플롯으로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관객의 눈은 똘망똘망하게 영화를 보고 있는 클로즈업 된 아나를 통해 동심의 관점으로 전환되는데, 이는 <벌집의 정령>의 서사 구축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반을 닦는다. 즉 서사를 바라보는 청자의 관점을 아이의 수준으로 하향조정 함으로써(다시 말해, 관객이 아이의 관점을 취득하게 함으로써) 영화가 묘사하고 있는 당대의 사회적 불안감과 혼란스러움, 죽음과 삶의 경계 속 일상에 대한 관객들의 체험 가능성을 극대화한다. 영화는 집단적 소비의 매체로써 ‘집단적 기억(memoria colectiva)’를 구성하는데 탁월한 매체이다. ‘집단적 기억’이란 과거의 한 사건에 대해 한 사회가 갖게 되는 의식으로서 과거의 사건에 대해 지적인 재현으로 드러나는 ‘역사’와는 다른 것이다(임호준, 2008). 에리세 감독의 청자를 지정한 서사 구축은 영화적 재현이 과거를 반추하는 행위로서의 체험이 아닌, 재현된 동시대를 다이제시스 인물들의 관점으로 체험하는 것으로의 집단적 기억을 지향한다. 분명하지 않음 즉 모호함의 미학은 일종의 후자 체험의 서사 도구이기도 하다. 서사가 명확하다면 관객은 반추적 체험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서사적 인과율의 핵심인 스토리의 순서를 추론하는 행위를 관객들이 끊임없이 하게 된다면(주진숙, 1993), 그것은 다이제시스적 몰입 체험을 방해하고 일반적 수준의 메타적 체험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호함의 서사는 처음부터 후자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고, 관객들을 등장인물의 관점에 일방적으로 놓이게 만드는 호명의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모호함의 서사는 어떻게 구축되는가? 에리세 감독은 이를 위해 작품을 온갖 은유적 장치들과 상징물들로 가득 채운다. 아나의 눈으로 영화적 세계관을 바라보되, 다양한 미장센들이 서사적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시가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과 같은 효과를 낸다. 아나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스토리 정보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어린 아이의 눈 - 더군다나 5살 꼬마 소녀의 눈으로 어른들의 복잡한 심정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때문에 주인공인 아나를 중심으로 서사를 진행하는 <벌집의 정령>은 스토리 전개에 불필요한 정보라고 할 수 있는 아나와 이사벨 부모님의 상세 정보에 대해서는 은폐한다. 이를테면, 내전의 패배자인 페르난도의 행위(글쓰기 등)에 대한 표면적 묘사는 보여주되, 그가 누구이며 왜 글을 쓰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아내에 대해서도 옛 애인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정보 외에 상세한 정보는 모두 부재된 상태이다. 중간에 등장하는 공화파 병사에 대해서도 정보의 부재는 마찬가지로 발생한다. <벌집의 정령>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아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인물들이지만, 5살의 꼬마 아이가 어른을 바라보듯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만 그들을 묘사할 뿐이다. 즉 불필요한 정보의 은폐와 부재는 ‘아나의 눈이 갖는 한계’를 통해 정당화되고, 이는 서사가 자연스럽게 아나를 중심으로 전개 될 수 있도록 기능한다. 이 과정에서 정보의 부재로 인한 관객의 심리는 한층 더 불안해지고 불편해지기 마련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함으로 인한 누적된 피로감은 관객들이 인과율의 추론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서사적 기제로 작동한다. 하지만 스토리 정보 범위의 제한은 역설적으로 각각의 스토리 정보의 심도가 깊어지도록 만든다. 에리세 감독은 관객에게 스토리 순서의 추론을 포기하게 만드는 대신 온갖 은유적 상징물이라는 당근을 서사 곳곳에 배치하였다. 즉 모호함의 서사는 모순적이게도 논리적 추론의 가능성을 강력하게 내포한다. 바로 이때 영화적 서사만이 갖는 모호함의 미학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모호함은 곧 논리적 추론의 가능성이 깃들어있음의 강력한 방증이다.  

 

  스토리의 논리적 전개를 아나의 눈이라는 장치를 통해 모호하게 위장을 치는 대신 에리세 감독은 반복적으로 혹은 클로즈업으로 상징물을 보여주거나 다양한 은유적 장치를 사용했다. 이를테면 상징물과 등장인물을 동일한 공간에 배치 하거나 장면 전환을 통한 몽타주의 구축 또는 메타포에 대한 카메라의 응시는 <벌집의 정령>이 결코 모호한 영화가 아님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벌집과 벌에 대해 페르난도는 “부단한 선동 속에 벌들은 가차없으면서도 요구되는 노력을 하고, 이내 죽음의 휴식을 취하며 그곳(벌집)은 병들거나 죽은 시체 조차 관대히 허용되지 않는다”라고 언급한다. 이는 정치적 혼란과 탄압의 시대 속에서 무의미 할 것 같은 저항을 이어나가는 저항세력들의 삶과, 권위주의 정권에 의한 인간성의 말살이 숭고한 죽음조차 허용하지 않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즉 벌집은 무기력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페르난도의 가정이자 이는 곧 당시의 사회상이며, 동시에 국가이자 극심한 혼란기에 빠져있던 전세계로 확장된다. 이 때문인지 영화 속 주된 서사 전개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나의 집은 벌집모양의 창문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이를 강조하듯이 집 내부는 벌집 모양의 창문을 통해 들어온 노란 빛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다. 아나의 집은 당시 사회상의 반영체이자 응축체이며, 가정의 구성원들은 당대를 살아가는 무기력한 이들의 메타포가 된다. 아나의 집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 이를테면 벌집 모양 창문 앞에서의 페르난도와 부인의 행위는 무기력감을 보여주는 은유적 표현인가 하면, 이사벨의 사고는(영화에서는 장난처럼 그려지지만) 죽음조차 숭고하게 얘기되지 못하는 당대의 사회상을 은유하기도 한다. 또한 에리세 감독은 아나와 이사벨의 침실에 천사가 아이를 데리고 가는 그림을 배치하여 이사벨의 비극적 운명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사벨이 모닥불 위에서 뛰노는 장면은 어떠한가? 검정색 옷을 입고 모닥불 위를 뛰어다니는 이사벨의 반복적인 몽타주는 마치 화장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 이사벨이 검은 형체에 이르렀을 때 화면을 멈추고 가만히 응시함으로써 이사벨의 죽음을 명확히 한다. 검정 고양이와 이사벨의 얼굴이 몽타주로 제시되는 흥미로운 몽타주를 활용한 서사 구축도 눈에 띈다. 우리는 이러한 은유적 상징물들의 활용과 몽타주를 통해 서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에리세 감독은 화자(카메라의 눈)를 아나로 명시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과 삶조차 명확히 구분해내지 못하는 5살 아이의 눈으로 서사를 접하게 된다. 아나의 모호한 사건 인식, 즉 표면적으로 보이는 모호한 서사를 에리세 감독은 앞서 언급한 장치들로 보완하며 관객의 논리적 이해를 돕는다.

 

  내러티브 영화에서 인과율 구축의 핵심이 되는 인물들의 인물소는 어떻게 제시되는가. <벌집의 정령>은 아나의 혹독한 성장을 그리고 있는 서사이기 때문에 인물들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사건 발생의 중심에 서 있는 아나는 자신의 성장 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변화까지도 초래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성장(변화)의 서사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을 ‘영화관’이라는 공간의 활용 대비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에리세 감독은 <벌집의 정령>의 서사가 아나의 눈으로 구축될 것임을 오프닝 시퀀스에서 영화관의 메타 구조로 보여주었는데, 서사가 끝나갈 무렵 영화관은 공화파 병사의 시신을 보관하는 장소로써 활용된다. 순수성의 탄생이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면 그것의 상실(죽음)도 동일한 장소에서 이뤄진다. 순수성과 죽음은 대척점에 있는 것이나 그것은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다. 나아가 순수성의 상실은 한 인간이 사회로 편입되는 성장의 순간이기도 하다. 영화관의 몽타주는 마치 수미쌍관의 구조를 이루며 아나의 서사가 성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성장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다. 아나의 성장은 어떻게 일어났으며,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아나의 아버지 페르난도는 프랑코 정권의 저항세력으로 보이지만, 공화파 병사와는 달리 무기력한 지식인이다. 아나의 어머니는 옛 애인을 잊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쫓는 것이 더이상 불가능할 것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그로인한 무력감으로 가정에 소원한 여인이다. 버섯에 대한 페르난도의 설명은 아이들의 흥미를 돋구지만 가부장적 위치는 강력한 라이벌인 패잔병이 등장하면서 점차 위기에 처한다. 나아가 군경대에서의 페르난도의 위상은 매우 초라해 보이는데 사무실에 출두한 그를 면도하던 군병대장은 내의 차림으로 그를 맞는다.(임호준, 2008) 아나가 아버지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에 대해 영화는 직접적으로 서술하지 않았지만, 카메라가 페르난도의 위상이 추락하고 있음을 보여주어 관객은 위기의 아버지를 감지하게 된다. 때문에 아나가 친밀함을 보이는 패잔병과의 라이벌 관계가 형성된다. 어머니 역시 옛 애인의 답장을 불태움으로써 그녀의 입지는 영화 속에서 더욱 좁아진다. 가정의 핵심인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심정적으로 멀어지는 카메라의 눈과 관객은 아나의 심정이 그들로부터 멀어졌음을 의미한다. 카메라의 눈을 통게 아나의 심정을 묘사하는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낯섦을 느끼게 만든다. 즉 우리는 아나의 심정과 동일시된다. 낯섦은 곧 무기력한 가정을 탈피하고자 하는 욕구로 표출되고 이는 성장의 시발점이 된다. 아나가 부모에게 느끼는 낯섦은 암울한 사회를 타개하고자 투쟁하는 패잔병에 대한 친밀감으로 표출되고, 창고를 찾아온 아버지로부터 도망침으로써 관객이 느끼는 낯섦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내 낯섦의 서사는 무기력하고 가정에 소원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각성시키는 계기로 나아간다.

 

  관객은 아나의 눈으로 대변되는 카메라를 매개로 인물에 대한 다양한 단서를 발견하고 그들에 대한 감정적 관계를 형성했다. <벌집의 정령>은 청자와 주인공 아나를 동기화 시킴으로써 ‘아나’라는 인물소에 대한 정보의 심도를 심화시켰으며, 이를 통해 아나에 대한 관객의 감정이입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때문에 영화가 끝나고 관객에겐 아나에 대한 강력한 잔상이 남는다. 즉 무기력한 사회를 타개하기 위한 행동하는 힘의 서사는 아이로 호명된 관객마저 성장시키고 각성시킨다. 이러한 서사적 체험은 아이의 눈이었던 관객에겐 강렬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그리곤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삶과 죽음의 경계 속에서 혹독한 성장통을 거친 아나와 관객은 벌집 모양의 창문을 과감히 열어젖힌다.

 

 


참고문헌 _

임호준. (2001). 위기의 남성들: 내전의 트라우마와 '새로운 스페인 영화'. 이베로아메리카연구, 12, 185-210.

임호준. (2008). 스페인문학 : 실화와 허구의 경계에서: 최근 스페인 내전 소설의 한 경향과 역사성찰의 한계. 스페인어문학(구 서어서문연구), 48(0), 277-298.

Bordwell, David, Thompson, Kristin. <Film Art(영화예술)>. 주진숙(). 서울: 이론과실천, 1993

 

영화 <벌집의 정령(The Spirit Of The Beehive)>, 1973, 드라마, 스페인, 빅토르 에리세(Victor Erice)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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