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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思惟)

[사유] 피크노렙시 Picnolepsie - 소멸의 미학(The Aesthetics of Disappearance), 폴 비릴리오(Paul Virilio)

by Dongwan. G 2020. 4. 30.

Picnolepsie


  피크노랩시는 ‘비번한’을 뜻하는 그리스어 피크노스 pcnos와 ‘발작’을 뜻하는 그리스어 렙시스 lepsis의 합성어로 ‘자주 일어나는 신경발작’을 뜻한다. 인류의 아주 오랜 질병이면서 아직도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간질 발작은 신이 인간의 몸에 들어온 신성한 병 으로 여겨지기도 했는데, 비릴리오는 간질의 미세한 경증을 일컫는 ‘소발작’을 피크노랩시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조명한다. 사회 각 분야의 한 현상으로서의 피크노랩시는 ‘빈번한 중단, 사고, 장애, 시스템 오류’ 등의 다양한 함의를 갖게 되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고, ‘기억 부재증’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지만 아직 의식의 공백 상태에 있는 어린 아이가 어떨결에 찻잔을 뒤엎는 경우, 어른들은 그 아이를 조심성 없는 띨띨한 아이로 취급한다. 피크노랩시(기억부재증)의 그 느닷없음과 비난당하는 특성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와 별개의 이야기이지만 발터 벤야민은 어린이와 여성의 문화를 비슷하게 본다. 정신과 의사 리셰는 여성적 속성에 대해 한걸음 더 나아가 성찰했는데 리셰의 견해에 따르면 “히스테리 환자는 일반 여성들보다 더 여성적이다. 히스테리 환자들은 즉흥적이고 격정 적인 감정, 변덕스러우면서도 예리한 상상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런 감정과 상상력을 이성과 판단력으로 제어하는 데는 무능력하다.”

 

  사진 작가 자크 앙리 라르티그는 그의 어릴 적 습관을 설명한다. 그는 우선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 시각적 목표물을 포착한 다음, 몸을 쨉싸게 세번 굴렀다. 그 다음 그는 자신이 본 것을 사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몸에 속도를 부여하는 ‘몸 구르기’만 으로도 사물을 시간에서 분리해 내어 순간에 ‘기록하기’의 목적을 달성했던 것이다. 자기 주위를 빛나는 카오스로 바꾸는 현기증이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어린이들은 늘 소용돌이, 원무, 불균형의 놀이를 즐긴다. 어린이들은 현기증과 혼란의 감 각에서 즐거움과 쾌감을 얻기 때문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가 보여주는 것은 공놀이의 그것처럼 사물의 놀이가 아니다. 그것은 사물의 이미지의 놀이이다. 놀 이꾼이 제자리에서 고개를 반복해 돌리면서 놀이꾼 스스로 대상을 투시하고 확대하고 변형시키고 지우는 이미지의 놀이인 것이다. 그리고 이미지를 재조합할 때 그 변주들의 생생함을 더욱 느낀다.

 

  어린이들은 육체 조직을 보완하거나 대체하기 위해 수 많은 인공보철물들을 사용한다. 그래서 도구에 의존하게 마련인 놀이는 간 단한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형태를 추적하는 일은 시간을 기술적으로 추적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놀이는 본 것과 보지 않은 것의 극단들 사이에서 기능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어린이들에게 놀이의 법칙들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만드는 놀이의 구성 체계 가 우리를 피크노랩시의 체험으로 이끈다.

 

  그래서 사실 간질의 경증 중세를 간질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러한 경미한 기 억부재환자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피크노랩시(기억부재증)는 잠들었지만 꿈꾸고 있는 모순 수면(감긴 눈 밑에 빠르게 움직이는 동 공)에 해당하며 오늘날에는 의식 차원의 모순 각성 상태라고 보편적으로 정의 내려지고 있다.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한다. 특수 효과 전문가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속도로 대상을 필름에 담는다. 조루주 멜 리에스는 이렇게 말한다. “트릭을 지능적으로 응용하면 초자연적인 것, 상상적인 것, 불가능한 것까지 눈에 보이게 할 수 있다니까” 피크노렙시 발작처럼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 필름에 찍힌 순간들의 유기적인 연속성을 깨뜨리는 힘이 영화기계에 있다. 그러면서 어린이가 풀로 종이 붙이는 놀이를 하듯이 시퀀스들을 다시 재조합하면서 시간의 외관상의 단절들을 모두 없앤다.
 

  마레는 운동성에 대해 깊이 천착했지만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시간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1880년대의 논쟁은 이러한 연속사진이 과연 ‘결코 본 적이 없는 것’, 즉 기억할 수 없는 불안정한 차원들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인지, 그 현실성 과 과학적인 가치를 폄하했다. 그러나 그는 형태를 명확히 할 수 없는 것들, 날아가는 새들, 나는 곤충들, 신경 질환의 비정상적 현 상들 특히 간질 등을 관찰하려 애썼다.

 

  과학이 명료하게 인식하려고 애쓰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잃어버린 순간들’이다. 그런데 멜리에스에게서 그 순간들은 보이는 것, 즉 외관을 만들어내고 창안하는 토대 자체가 된다. 보이지 않는 잃어버린 순간들인 “사이의 시간성”은 멜리에스가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경이로운”이라고 표현하는 형상들을 눈에 보여준다.

 

  형태를 포착하는 행위는 시간의 기술적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마레에게 실재 효과는 사실 빛의 전송으로 빚어지는 속도의 효과이다. 마레는 빛을 시간의 그림자로 만들었다.

 

  유기체가 노화되면서 인간의 갖가지 영민한 능력과 젊음의 힘도 상실된다. 시간과 유희하고 시간을 자기 보호와 창조적 발명의 체 계로 활용하던 어린 라르티그에게서 나타났던, 시간의 연속적 흐름을 깨뜨리는 효과를 작동시키고 통제하던 힘도 중단된다.

 

  성숙할 시기의 청소년은 전과 달라진 자신의 몸을 낯선 이방인으로 여기고, 이런 발견에서 일종의 단절감을 겪으며 절망에 빠진다. 그래서 성적 성숙기는 나쁜 습관들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하지만 이 습관들은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자 하는 노력이며, 유년기 말기 에 소멸되었던 간질 발작 현상이 다시 나타나 경미한 증세로 다르게 표현된 것일 뿐이다. 또한 이때는 매체의 역할을 하는 기술보철 구들(라디오, 자동차, 사진, 전자 음향 등)에 푹 빠지는 나이이기도 하다.

 

  충동적이지 않고 침착한 성인은 자신이 어리아이였을 때, 즉 자신이 영원한 존재라고 믿던 때를 모두 잊은 것 같다. (에드가 앨런 포)

  도박은 재창조라는 유년기의 기본 요소가 파렴치한 흥분 상태로 타락한 예이다. “자기만 유일하게 진리를 인식한다고 여기고 그 안에서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회복한다고 믿게 되는 고양감”이 이러한 도박(로또나 삼연승 복권)에 내재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도 박은 소득과 사회 법칙을 거역하는 가치도 가진다.

 

  누구나 피크노렙시라는 매개적 시간의 불안정한 구조에 의해 다른 누구의 시간도 아닌 나만의 시간을 살게 될 것이다. 따라서 피크 노렙시는 곧 인간적 자유의 선언을 의미한다.

 

  베르그송이 시간향성을 논했을 때, 우리는 이미 ‘지속되는 시간의 서로 다른 리듬들’을 상상할 수 있었다. 여기서 리듬의 개념은 어떤 자동주의를, 인간이 체험하는 시간에 때로는 강렬하거나 때로는 약한 시간성이 중첩되는 대칭적인 반복을 내포한다. 간질 증상 은 횟수를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하게 급작스런 발작이 일어나면서 신체나 의식이 다양하게 변형되는 게 특징이다. 이런 간 질 증상의 비규칙성에서 문제는 더 이상 긴장감이나 주의력의 정도가 아니라 단순하고 순수한 중단, 실재의 소멸과 재출현, 그리고 시간에서 분리되는 현상이다. 베르그송은 “정신은 지속되는 사물이다”라고 말했다. 사유하는 것은 우리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의식의 첫 생산품은 시간의 흐름 속에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는 속도일 것이다. 따라서 속도는 인과 관념, 관념 이전의 관념일 것이 다. (베르슈타인의 재담, “직관, 그것은 과속의 속도 위반을 범하는 지성이다.”)

 

  하워드 휴즈에게 어느 날 미키 마우스 캐릭터로 변장한 한 남자가 찾아와서 그에게 미키 마우스 시계를 선물하려 했다. 그러자 휴 즈는 자신은 ‘시간의 지배자’라며 일어지하에 선물을 거절했었다. 힘을 소유하는 것. 세계와의 놀이에서 승리하는 것, 그것은 개인 시간의 기준 잣대를 천문학적 시간의 기준틀에 일치시키지 않고 분리하는 것이다. 휴즈는 끝없이 자신의 비행 기록을 깨뜨렸다. 그 가 세계일주를 마치고 나흘 전에 이륙했던 그 지점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궁극적으로 움직임의 욕망은 실은 머물 곳이 도래하는 걸 보려는 욕망일 뿐이라는 분명히 나타낸다. 그것은 극한의 관성, 너무도 빨라 정지에 가깝고 싶은 욕망이다. 그래서 이후 휴즈는 간 혹 움직일 때라도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느낌을 없애버리기 위해 자신을 가두는 방을 모두 비좁고 똑같이 만들었고 스스로를 가두었다.

 

  휴즈는 관성의 욕망에 빠진 나머지 기술의 수도사가 된 것이다. 결국 미국인들은 휴즈를 ‘신의 계시를 받은 자’로 여기게 되었다. 라스베가스의 호텔에 칩거하는 것과 고대의 은자들이 영원성을 추구하기 위해 사막으로 향하는 것에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간질 체질이 농후한 독일예술가들에게서는 자연히 일반 이성의 이상은 희미해진다. 일반 이성은 깨어있는 인간에게 활기를 불어 넣 고, 실재의 검열관으로 활동해야 하는, 공통의 것으로 주어진 세계에서 깨어있을 것을 주장하는 법이다. 그러나 각 개인의 시간이 어느 정도 접합된 것이고, 빠른 각성은 꿈 못지 않게 모순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흘러가고 있는 세계의 현실은 어느 경우라도 공통 의 것으로 간주될 수 없을 것이기에, ‘순수이성’은 피크로렙시의 수많은 핑계들 중의 하나이자 술수일 뿐이리라.

 

  사도 바울은 “이성은 죽음과 닮았다”고 말했다. 이성이 죽음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은, 이성이 피크노렙시에서 빚어진 일시적인 부재 현상들을 조직적으로 재배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재에 대한 합리적인 연구, 그것이 바로 영화이다.

 

  현세적이고 놀람을 거부하는 합리적 이성의 축적은 우리 현대인들을 파리잡이 끈끈이에 무심히 들러붙은 파리 같은 기억에 시달리 는 인간이 되게 만든다. 아무런 균열도 없는 컴퓨터 집적 회로에는 기억 정보들이 빠른 속도로 와 들러붙는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새롭게 집적된 요소들 자체가 아니라 그 요소들이 배열된 질서라고 파스칼은 말했다. 파스칼은 그 일을 ‘결국에는 이성을 감정에 양 보해서’ 이루어낸다.

파스칼은 간질 발작의 한복판에는 감응력, 즉 미학적인 감정이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았다. 의외로 간질은 충동적이기 때문에 다스려질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예찬했다. “숭고한 고양감에 휩싸이는 그 순간을 위해 나의 전생애를 바치리!” 그는 발작이 지나가고 제 정신으로 돌아와서 다시 새로이 실존하기 전까지는 말 그대로 ‘도취되고 정신을 빼앗겼다’. 하지만 돌연한 발작은 그를 심각한 기력 탈진과 정신적 좌절에 자주 빠뜨렸다.

 

  우연한 사고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열광 상태에 뒤이어 온다. 육체의 붕괴는 감각의 붕괴 뒤에 온다. 사고를 촉발시키는 요인은 부주의나 어떤 반복되는 리듬으로 의한 졸음 상태때문이거나, 강렬한 지적 활동과 아주 반대의 것일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순간 나는 ‘시간은 더이상 없으리’라는 기이한 표현의 뜻을 감지했다”라고 했다.

 

  프루스트는 예술의 충동이야말로 정보가 외부에서 내부로 입력되는 속도에서 무엇보다 빠르다고 본다. 나아가 프루스트는 사건은 감정의 흐름에 이끌려 마루리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사건은 감정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기회’라고 부를 수 있는 카이로스적 시간은 보편성을 벗어나서 내가 속한 환경을 다른 것을 향하여, 그리고 차이를 향하여 열어준다. 그것은 어느 특별한 순간에 다 른 차별화된 정의가 필요한 신적인 관용이기도 하다.

 

  ‘새로운 것, 발견은 분명히 우연이 아니라 놀람에 속한다.’(P. Joliot)
  르네 마그리트가 말했다. “친숙해 보이는 것이 한편으로는 낯설게도 보이는구나”

 

  베르나데트 수비루스는 “한번 체험하면 그 순간을 다시 얻기 위해 사람들은 전 생애를 바칠 겁니다.”라고 말한다. 느베르의 수도 원에 숨어서 바로 그 순간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그녀는 35세에 죽는다. 그녀는 산속에서 짐승들을 돌보다 “빛의 덩어리가 소용돌 이치며 점점 크게 확대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영들이란 간질 질환의 부재 증세에 앞서 놀라운 순간들이 반복되는 현상과 같은 것이다.

 

 


참고문헌 - 소멸의 미학, 폴 비릴리오,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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