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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s Movie & Rock 'n' Roll

[Week's Movie] 장준환 감독의 데뷔작, 영화 <지구를 지켜라, 2003>

by Dongwan. G 2020. 6. 17.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는 한국 영화, <지구를 지켜라, 2003>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기에 속하는 2003년은 작품성과 다양성이 폭발한 해로, <지구를 지켜라>는 그 틈에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전대미문의 장르 데뷔작이라 할 수 있다. <살인의 추억>과 <바람난 가족> <올드보이>가 작가주의의 본격화를 알렸고, <장화, 홍련>과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싱글즈> <황산벌> 등이 충무로식 상업영화의 가능성을 더욱 공고히 했으며, 그해 말 개봉한 <실미도>는 마침내 한국영화가 상업적으로 가본 적이 없는 곳까지 도달했다. 이 틈에서 상업적 실패작인 <지구를 지켜라>가 역설적이게도 장르영화로서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정교하게 의도된 ‘비(B)급 정서’에 기인한다.

 

  <지구를 지켜라>는 ‘병든 지구’의 모습을 한 병구와 과거 정·재계 권력자들의 형상을 조합한 듯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외계인을 통해 망상을 현실로, 바꿔 말해 판타지를 리얼리티로 전복하며 꼬집는다. 이는 결과적으로 진부한 주제와 미덕에 기괴함을 끌어들여 오히려 그것을 ‘낯설게 하기’에 이른다. 장준환 감독의 이러한 영화적 세계관은 인간성을 둘러싼 현실의 잔혹함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냈고, 결국 그동안 상상력을 유보당했던 충무로식 장르영화에서 새로운 성취를 이룩한다.

 

 

# 폭력의 역사를 고통스럽게 돌아보다

  <지구를 지켜라!>는 마냥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많은 관객들이 상업영화에 기대하는 요소 대신에, 사람들이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내용들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예를 들면, 병구가 납치한 강사장을 갖가지 방법으로 고문하는 장면이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데, 강사장을 연기한 백윤식은 인터뷰에서 “연기생활 30년 넘도록 별의별 상황을 다 겪었지만 이렇게 집중적으로 장시간 동안 고통을 겪은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여기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영화 속 병구가 아무 이유 없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병구가 강사장을 납치, 감금, 고문하는 장면이 등장한 뒤에는, 지독하게 현실과 맞닿아있는 이야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어린 시절부터 외부의 폭력에 노출되어 살아왔던 병구는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교도소에서는 교도관에 의한 폭력의 피해자로 살아간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 강사장의 회사인 화학공장에서 엄마, 여자친구와 함께 일하게 되지만 공권력의 파업 진압 과정에서 그들마저도 잃게 된다.

 

 

  “고통이라는 건 절대 익숙해질 수 없다”고 말하는 병구는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끊임없이 향정신성 의약품을 훔쳐 복용하고, 그 부작용으로 과대망상에 사로잡힌다. 이렇듯 SF의 외피를 두른 이 영화는 현실의 폭력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 관객들에게 고통스럽게 다가오기도 한다. 특히 병구와 강사장의 관계는 가학적으로 묘사되고, 병구의 집 안에서 자주 목격되는 마네킹, 인형 등을 포함해 영화에는 신체 절단의 이미지들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등장한다.

 

  ‘지구를 지켜라!’는 앞서 언급한대로 관객들의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영화다. 혹자는 시대를 앞서간 걸작이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과대평가된 영화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또한 영화의 흥행 실패가 단순히 마케팅의 문제였다고 판단하기에는 냉정하게 말해서 의구심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극단적으로, ‘지구를 지켜라!’의 마케팅 방향을 바꿔 가까운 미래에 재개봉한다고 한들, 평단의 극찬을 받은 만큼 흥행하리란 보장은 없으니 말이다. 


  개봉 당시 영화 관계자들의 낙관적인 예상이 빗나가며 흥행에 참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던 관객들도 있었다. 게다가 2008년에는 지난 10년간의 개봉작 중 다시 보고 싶은 영화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이후에도 개봉 10주년 기념 상영회가 열렸고, 작년에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20주년 특별전에 초청되었으며 샤이니의 키(Key)가 출연한 연극으로 재탄생했다.


  돌아보면 2003년은 ‘지구를 지켜라!’를 비롯해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그리고 배우 장진영의 ‘싱글즈’까지, 여전히 회자되는 다양한 한국영화들이 만들어졌던 시기였다. 작년도, 올해도 한국영화가 개봉하면 관객들의 꾸준한 발길이 이어지고 있지만, 비슷한 공식을 따르는 기획영화들이 매년 등장하는 현상을 보면 오늘날 영화계는 과거처럼 창작자들이 상상력과 창의력을 자유롭게 발산할 수 있는 풍토는 아닌 것 같다.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겠지만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개성으로 무장한 ‘지구를 지켜라!’가 만들어질 수 있던 것은 신인감독의 패기 넘치는 아이디어도 과감히 영화화할 수 있을 만큼 문화적 다양성이 존중받는 시대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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