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동완
국문학자이자 소설가인 마광수는 소설에서 일컬어지는 카타르시스가 감정을 정화시키는 역할도 하지만 ‘배설’의 뜻이 더 강하다고 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는 갈등 양상이 복잡해지고 각 계층으로부터 다양한 요구가 쏟아졌다. 그러나 공동체의 갈등 해소를 위한 정치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고 사회와 유리되어져 갔다. 정당 체계가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갈등과 분열의 응축된 힘은 예술로 전이되었다. 90년대 부터 우리 영화계는 묵시록적이거나 피카레스크식 장르를 띠는 작품을 연출함으로써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걸출한 성과를 배출했다. 하지만 진정 대중의 매체라 할 수 있는 레거시 미디어(TV)는 어땠는가? 기성 방송사들은 우리 사회의 첨예한 갈등 양상 반영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뒤늦게서야 종편이 개국한 후 성찰의 결과물로써 변화의 물꼬가 터지기 시작했다.
넷플릭스는 레거시 미디어가 할 수 없었던 검열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방심위에 의한 제도적 검열이든, 방송사 내부에서의 이데올로기적 검열이든 넷플릭스에서는 의미가 없다. 검열이 작동하지 않을 때 예술의 창작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것의 결과물로써, <오징어 게임>은 사실상 ‘고삐풀린 망아지’격인 메가 트랜드가 되어버렸다. 사회 갈등과 양극화는 정점을 향해 치닫는데 그것을 과감히 대리 ‘배설’해 줄 콘텐츠가 나타난 것이다. 제대로 된 배설을 위해서는 부조리에 대한 묘사의 적확성과 그것을 표현하는 범위의 제한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동안 권위를 내세우며 변화를 거부했던 레거시 미디어는 배설을 위한 콘텐츠는 커녕 K-드라마의 첫 흥행 작품인 <겨울연가>로부터 내려오는 족보를 잇기 위해 가족물과 연애물 드라마만 주구장창 찍어냈다.
최근 <SKY캐슬>, <펜트하우스>가 인기를 끌었던 것도 사회 갈등을 드라마가 제대로 반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은 그런 K-드라마의 변화의 정점에 섰다. 특히 <오징어 게임>은 묘사나 이야기 전개를 위한 요소부터가 굉장히 육감적이다. 뿐만 아니라 서사는 거침없이 ‘끝까지 달린다’.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욕망을 향해 내달리는 주인공들과 순결조차 욕망을 쟁취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 극중 한미녀는 이제껏 레거시 미디어가 쳐놓은 금줄을 보기 좋게 뛰어넘는다. 그야말로 시청자들의 ‘배설’을 위해 ‘끝까지 달린다’.
세계를 매료시킨 ‘고삐풀린 망아지(오징어 게임)’는 우리나라의 유일무이한 작품은 아니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던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도 하나같이 우리 사회가 풀지못한 분노를 배설했던 ‘고삐풀린 망아지’였다. 혹자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라고 말했던 봉준호 감독의 위트있는 수상 소감을 인용해선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며 <오징어 게임>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현상에 대해 자평할 순 있다. 그러나 관점을 조금만 달리한다면, 그동안 호소할 곳이 없었던 우리 사회의 분노를 정치와 기성 미디어가 제대로 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래 ‘예술’은 사회를 반영한다고 하지만 그것을 책무로써 수행해야 하는 정치와 미디어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오늘도 <오징어 게임>은 고삐풀린 망아지가 되어 배설을 위해 끝까지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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